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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라면 끓이듯 김치 담그는 세상” 69세 김치 장인의 꿈[한우물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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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6-04-13 조회수 34

“라면 끓이듯 김치 담그는 세상” 69세 김치 장인의 꿈[한우물보고서]

202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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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의 ‘맛있는 부엌’ 르포

청와대 러브콜도 거절하고 김치 연구

10년 기록, 마지막 꿈은 ‘한식 식재료 사전’


지리산 골짜기에 사는 일흔을 앞둔 노파는 소녀의 눈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작가, 대표, 선생님…. 저마다 다른 단어로 노파를 부르지만, 그는 스스로를 ‘음식문화 운동가’라고 생각한다.


지난 6일 전북 남원시 ‘맛있는 부엌’에서 만난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출처: 국민일보]


식목일 다음 날인 지난 6일, “지금쯤 씨를 뿌려야 한다”고 말하는 고은정(69) 제철음식학교 대표를 전북 남원 산내면 ‘맛있는 부엌’에서 만났다. 마당에 항아리 수십개가 가득한 이곳은 그가 매년 이른 봄 메주로 간장과 된장을 담그고, 11월 마지막주에는 김장을 담그는 곳이다. 그사이에는 제철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며 한 해를 온전히 만끽한다.


‘맛있는 부엌’ 앞마당에 놓여 있는 항아리들

[출처: 국민일보]


이날 ‘맛있는 부엌’ 한켠에는 쪽파 5단과 알타리무 10㎏이 놓여 있었다. 2주 뒤 이곳을 찾을 제철음식학교 수강생들이 맛볼 김치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고씨는 제철음식학교에서 제철 식재료로 한상차림을 차리는 법을 가르친다. 이번 달에는 기장깍두기와 알타리무김치를 담글 예정이다.


“김치는 갓 담갔을 때 바로 맛볼 수 있지만, 익으면 어떤 맛이 되는지 알기 어렵잖아요. 익은 김치의 맛을 직접 느껴봐야 하니까 미리 준비해두는 거예요.”


‘김치 장인’이 된 학원 원장님


이날 만든 김치에 사용된 쪽파를 다듬고 있는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출처: 국민일보]


지금이야 ‘김치 장인’으로 불리지만 사실 고씨는 30대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학원을 운영하던 젊은 원장이었다. 그러다 마흔살이 되던 해 IMF가 터졌다. 모든 사업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고씨는 학원을 운영하던 시절에도 딸이 학교에서 소풍을 간다고 하면 김밥을 200줄씩 말았다. 딸아이 김밥, 선생님 김밥, 혹여나 도시락을 챙겨오지 못한 아이들의 김밥까지 챙겨 보내고 나머지는 학원에 가져가 수강생들과 나눠 먹었다. 빈털터리가 된 고씨가 음식의 길로 접어든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무작정 책을 보며 몸이 약이 되는 음식을 공부하길 8년, ‘누구에게나 좋다’는 말만 반복되는 책들에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2005년 원광디지털대학교 한방건강학과(현 한방건강약선학과) 1기 입학생이 됐다.


‘맛있는 부엌’ 입구에 걸려 있는 약식동원(藥食同源) 현판

[출처: 국민일보]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고,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면역력을 다시 끌어올리고, 병에 걸렸을 때 치료 보조의 수단으로서 기능하는 음식을 ‘약선’(藥膳)이라고 부릅니다. 그때 4년 동안 배운 게 음식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죠.”


약선의 개념을 단순한 ‘몸에 좋은 음식’이 아닌 치료와 예방을 아우르는 하나의 체계로 이해하게 된 그는, 이후 제철 식재료와 조리를 결합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제철 식재료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제철이라는 말은 그때 가장 많이 나온다는 의미에요. 생명력이 가장 왕성하다는 뜻이거든요. 몸에 좋을 수밖에 없죠.”


이날 먹은 봄내음이 가득한 점심

[출처: 국민일보]


쪽파를 한 시간가량 다듬다 보니 금세 점심시간이 됐다. 엄나무순 당귀 더덕순 취나물 파김치 배추김치…. 점심 한상에는 역시 제철 음식이 가득했다. 함께 자리한 이영란(57) 제철음식학교 강사가 일주일 사이 몰라보게 달라진 취나물의 맛에 감탄을 터뜨리자 고씨가 “지난주만 해도 땅에서 막 나온 애들이라 아기처럼 연약했는데 일주일 사이에 제법 줄기에 힘을 채워 식감이 단단해졌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러브콜도 거절하고 ‘김치 공부’에 ‘올인’


‘김치책’(몽스북)에 나와 있는 조리법대로 만든 알타리김치의 모습

[출처: 국민일보]


그가 이토록 음식에 ‘진심’인 것을 먼저 알아본 곳은 청와대였다. 문재인 정부 초창기, 청와대에서 그를 셰프로 영입하기 위해 여러 번 찾아왔지만 고씨는 매번 사양했다. 주변에서는 ‘탄탄대로가 열릴 텐데 왜 가지 않느냐’며 의아해 했다. 그는 “대통령 부부를 위한 밥상도 정말 귀한 일이지만, 나는 그 두 분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더 많은 이에게 닿고자 하는 진심은 김치의 대중화로 이어진다. ‘음식문화 운동가’를 자처하는 그의 꿈은 소박하면서도 원대하다. 모두가 라면을 끓이듯 쉽게 김치를 담그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싼 재료나 복잡한 조리법을 고집하지 않는다.


맛있는 부엌의 모습. 검은 식재료는 ‘장석’으로, 메주를 담은 장독대에서 나온 소금이다. 그 옆에는 표고버섯 등을 말려 놓은 소쿠리가 있다. 수강생들은 뒤에 전시된 접시들을 자유롭게 골라 제철 한상을 담아 먹는다.

[출처: 국민일보]


이날 만든 김치에 쓰인 새우젓도 가격이 저렴한 ‘추젓(가을에 잡은 새우로 만든 젓갈)’이었다. 알타리무에 무청을 예쁘게 감아서 김치통에 넣어야 하느냐는 질문에도 그는 손사래를 쳤다.


“전혀 그럴 필요 없어요. 김치가 어려워지기 시작하면 일상의 반찬이 될 수 없거든요.”


알타리김치와 함께 만든 기장깍두기. 날치알처럼 보이는 것들이 모두 기장이다.

[출처: 국민일보]


고씨는 김치를 담그는 과정에서 마치 실험을 하듯 재미를 찾는다. 가자미식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기장깍두기가 대표적이다. 김치는 발효 과정에서 유산균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이때 유산균의 먹이가 되는 탄수화물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흔히 김치에 찹쌀풀을 넣는 이유다.


그는 여기서 고정관념을 깼다. ‘꼭 찹쌀풀이어야 할까’ ‘같은 탄수화물이면 되지 않을까’…. 고씨는 보리밥을 넣고 열무김치를 담가보기도 했다. 때로는 감자가 조리법에 등장하기도 했다.


전날 만들었다는 산갓물김치

[출처: 국민일보]


최근 그는 이러한 철학을 집대성해 사계절 제철 김치 45가지 조리법을 담은 ‘김치책’(몽스북)을 펴냈다. 지역마다, 집집마다 천차만별인 김치 맛을 하나의 책으로 엮는 작업은 고씨에게 ‘타협과 균형’의 과정이었다.


“나의 꿈? ‘한식 식재료 사전’ 발간”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의 수업을 들었던 수강생들이 남겨준 롤링페이퍼

[출처: 국민일보]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담백한 김치를 먹고 자랐지만 그는 어느 한 지역에 치우치기보다, 서울·경기식과 남도식의 중간 지점을 찾는 데 집중했다. 황석어젓 대신 새우젓과 멸치액젓, 또는 갈치젓 등을 활용해 감칠맛은 살리되 지나치게 강하지 않도록 조정했다. 특히 끓여 만든 일반 액젓이 아니라, 끓이지 않고 걸러낸 ‘진젓’을 사용해 보다 깊고 깔끔한 맛을 구현했다.


흥미로운 점은 외국인의 입맛을 따로 맞추려 애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외국인 입맛을 고려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했다”고 단호히 답했다.


다만 겉절이를 샐러드처럼 소개하는 식의 접근법은 열어두었다. 실제로 그가 만난 외국인들은 젓갈 재료에 거부감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맛있는 부엌 한켠에 마련된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의 문서 작업 공간

[출처: 국민일보]


“외국에 가면 그 나라의 본래 음식을 먹고 싶지, 변형된 퓨전 음식을 찾지는 않잖아요. 김치도 마찬가지예요. 가장 우리다운 형태를 그대로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외국인의 입맛을 ‘고려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들을 배려한 셈이죠.”


고씨의 휴대전화는 밥을 먹을 때도, 쪽파와 알타리무를 다듬고 김치를 버무리는 동안에도 잊을만하면 울렸다. 모집 중인 간장 강의가 마감됐냐는 문의 전화가 오기도 했고, 혹시 김치를 파냐는 황당한 전화를 받기도 했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셰프가 자신이 담가놓은 장을 보러오겠다는 반가운 전화도 있었다.


한 언론사에 투고하고 있는 오일장 원고 파일들

[출처: 국민일보]


물론 가장 많이 온 전화는 원고 마감과 관련된 전화였다. 그는 신문 연재와 원고 청탁, 출판 계약 등을 병행하며 꾸준히 글을 써왔다. 초기에는 집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제철 음식을 주제로 2년간 주 1회 연재한 글을 모아 첫 책을 냈고, 이후에는 전국의 오일장을 돌며 식재료와 음식을 기록하는 작업을 5년째 이어오고 있다. 현재는 개인의 삶과 음식을 연결한 새로운 책 출간을 준비 중이다.


이 모든 작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식 식재료 사전’을 만드는 것이다. 고씨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제철 식재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없다”며 “누군가 한식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도 참고할 만한 기본 자료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구상 중인 책은 단순한 요리책이 아니라, 계절과 생산 시기, 활용 방식까지 아우르는 일종의 데이터베이스에 가깝다. 계절별 식재료를 중심으로 하되, 쌀처럼 수확 시기와 소비 시기가 다른 재료들까지 포함해 구조를 짜고 있다.


문제는 출판이다. 방대한 분량과 제작 비용 탓에 출판사를 찾지 못하고 있다. 10년 넘게 자료를 모아왔고, 13년째 함께 작업한 사진작가와 전국을 돌며 기록을 쌓아왔지만, 이를 책으로 완성하려면 편집과 디자인, 인쇄까지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 상황이다.


언젠가 '맛있는 헌책방'이 될 맛있는 부엌의 모습

[출처: 국민일보]


그는 “언젠가는 반드시 해내고 싶은, 사실상 마지막 꿈”라며 “이 작업을 생각하면 지금도 전국을 돌아다닐 힘이 난다. 아직도 오일장에 가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길을 가다 계절 식재료가 보이면 차를 세우고 확인한다”고 말했다.


“언젠가 일을 그만두게 되면 지금 이 공간을 헌책방으로 바꾸고 싶어요. 손님이 헌책을 몇 권 고르면 ‘밥 먹고 갈래요’라고 말을 붙일 수 있는 그런 곳이요. 밥은 마음도 관계도 모든 걸 같이 키우잖아요. 허리가 꼬부라져도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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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끓이듯 김치 담그는 세상” 69세 김치 장인의 꿈[한우물보고서]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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