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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DU 졸업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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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4년 2월_우수작] 나의 사랑 원디대 - 최경희 등록일 2014-02-19 조회수 2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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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_우수작] 나의 사랑 원디대 - 최경희

201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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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원디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여자 혼자서 월급을 받아 생활을 꾸린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생각도 못 해 봤다.하지만 앞만 보고 살아야 하는 현실 앞에서 난 각오를 새롭게 해야 했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혼자 설계를 해야 했다.한국어문화학과 최경희

- 여보세요? 거기가 팜티또찐님 댁인가요?
- 아~ 네 맞는데요?
- 저는 오늘부터 또찐님 한국어 봉사를 맡은 최경희입니다. 반갑습니다. 댁 근처에 도착했는데 방문해도 될까요?
- 네 집에 있습니다. 오세요.


오늘은 학과 사무실 연락을 받고 봉사를 하기로 한 첫날이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중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익산시건강가정지원센터 부센터장님이시란다.

“최경희님은 익산시 건강가정지원센터 공채에 합격하셨습니다.”
“네? 정말이예요? 감사합니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 된 것이다. 뜻밖의 전화를 받고 너무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첫 봉사를 다녀왔다. 오늘 처음 만나는 또찐님을 만나러 온 것이 내게 행운을 준 것 같다고 하며 우린 첫 만남을 가졌다. 베트남에서 온 결혼이민자인 또찐님은 성실한 한국남편을 만나서 두 아이의 엄마로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고, 베트남 문화를 한국에 전하는 문화전도사로 일하고 계시는 아주 야무진 사람이었다. 이름까지 서현이란 한국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한국말도 유창했다. 나와는 아줌마란 공감대와 배우고 익히는 데 매력을 느끼고 꾸준히 내일을 준비한다는 또다른 공통점도 있었다. 나이차도 많아서 동생삼고 싶은 사람이었다.

원광디지털대학교 한국어 문화학과에 입학원서를 낼 때 내 처지는 최악이었다. 한달 일해서 받은 월급은 항상 3-4이면 거의 바닥이 드러나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특히 아이들 방학이 있는 한여름과 한겨울이 제일 큰 문제였다. 여름엔 전기세, 겨울엔 가스난방비 때문에 공급중지 최고장을 매번 받아야 했고 유예신청을 내거나 사정 얘기를 해서 분할 납부를 해야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이런 일상을 고스란히 10년 가까이 견뎌내며 내게 항상 힘이 된 것은 주변의 관심과 보살핌 이었다. 또 내 두 아이들이 정말 이쁘게 잘 커 줘서 웃을 수 있었고 희망과 꿈을 잃지 않았던 것 같다.

여자 혼자서 월급을 받아 생활을 꾸린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생각도 못 해 봤다. 하지만 앞만 보고 살아야 하는 현실 앞에서 난 각오를 새롭게 해야 했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혼자 설계를 해야 했다. 지금의 직장은 너무 따뜻하고 함께 일하는 어른님들의 말씀만으로도 넉넉하고 배가 부르다. 정말 원망생활이었던 과거의 나를 쉽게 버리고 감사생활로 나를 바꿔놓은 소중한 직장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나를 더 부추긴다. ‘너의 아이들 너의 미래를 위해 안주하지 말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라고. 그러려면 너의 역량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넌 어려서부터 하고 싶은 일이 있었지? 아직 늦지 않았어. 그 꿈을 다시 꿔!’ 하는 소리가 절망적일 때 항상 귓가에 소근거렸던 것 같다.

치과에 가서 인플란트를 해야 돼 몇 달치 월급에서 조금씩 모은 돈이 꼭 등록금 만큼 모아졌다. 당시 내 왼쪽 어금니는 발치를 하고 보조치아를 해서 인플란트를 하기 위해 임시로 걸어놓은 상태였다. 난 그 돈으로 원디대 등록금을 냈다. 첫 등록금을 내고 ‘일단 입학을 하면 뭔가 또 길이 있겠지’ 그때는 그 생각 밖에 없어서 ‘일단 일을 저질러 보자’ 했다. 지금의 내 나이도 생각이 안 났고 그 다음 학기 등록금도 생각이 안 났던 것 같다.

처음 입학을 해서 책을 구입하고 강의를 듣는데 너무 좋아서 잠이 안 왔다. 내가 대학에 들어오고 싶었던 이유는 2006년도에 한번 크게 울고 난 후부터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나는 업무능력이 누구한테 밀리지 않을 정도의 자격증과 컴퓨터 활용능력도 어느 정도 자격을 갖추어서 직장생활을 자신감 있게 잘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서 도전을 했는데 최종관문에서 최종학력이 걸려서 첫 번째 후보가 된 적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억울하고 원통해서 많이 울었다. 그러려면 처음부터 고졸은 제외시켰어야 했다. 높은 점수를 받았었고 6개 시에서 선택이 되어져 함께 교육을 받았던 교육생 동료들은 ‘넌 꼭 된다’라고 격려를 해 주었었다. 최종학력이 문제가 되어 떨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다. 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걸고도 학력 때문에 미끄러진다면 앞으로 내 꿈은 영원히 이룰 수 없을 것이란 쓴맛을 본 것이다. 그 일 이후 깨끗이 접고 살았다. ‘내 현실이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데 어찌 꿈을 꿔’ 하며 애써 땅 속에 묻고 살았다

. 그런데 또 다른 난 그게 안되었나 보다. 치과에 갈 돈을 대학 입학금으로 덜렁 내어 놓고는 잘했단다. 치과 의사도 어이상실이라고 하셨다. 하다만 치료는 어찌할 것인지 대답을 하라고 했다. “원장님이 보조치아를 정말 너무나 튼튼하게 만들어 주셔서 이대로 졸업할 때까지 살아도 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졸업 후 고민해 보겠습니다.” 이게 내 대답이었다.

그 후 난 한 번도 후회를 해 본적이 없다. 하루 업무가 힘들고 때론 갈등이 생겨도 마냥 행복한 학교생활이었다. 주말엔 기회만 있으면 한국어 봉사꺼리를 찾았고 미력하지만 외국인 유학생들을 만나 한국의 정서도 나누고 밥도 나누고 한국어 봉사도 하였다. 실감나게 학교생활을 하였다.

물론 혼자의 힘으로 어렵다는 것 잘 안다. 제일 고마운 사람은 내 아이들이다. 엄마가 행복해져서 자기들도 기쁘다고 말해 주었다. 밥을 제대로 못 챙기고 엄마 노릇을 잘 못해도 이해해 주고 ‘우리가 그 정도는 한다’며 어느새 커서 내게 힘을 실어 주었고 직장에서는 항상 따뜻한 격려와 학비를 지원해 주셨다. 내 직장은 원불교총부 재정산업부였다. 부서장님께서는 항상 따뜻하고 멋진 미소로 제 어깨를 다독여 주셨고 함께 일하는 어른님들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제 일상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봐 주셨다. 그래서 난 이제 졸업을 한다. 2014년 2월 졸업생이 되었다.

배은망덕? 이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난 졸업을 앞두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했다. 무사히 졸업을 하도록 항상 격려를 해 주시던 분들께 남아서 공을 갚기는커녕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며 도전장을 낸 것이다. 첫 번째 도전장을 낸 곳이 바로 익산시 건강가정지원센터였다. 이곳의 공개채용 공고를 보고 홈피를 들어가 살펴보니 이곳이 내가 찾던 그런 곳이었다.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주고 지켜주고 위기가족을 도와서 가족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원불교총부에 취업을 해서 마음공부란 말도 알게 되었고 일하면서 나도 모르게 나또한 치유가 되고 공부가 되어 스스로 행복을 찾을 줄도 알게 되었지만 제일 큰 소득은 자신감이다. 내가 앞으로 학교를 졸업해 어떤 자격이 생겨서 또다른 일에 도전장을 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일하면서 개인적인 성취감도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많은 것을 받기만 하고 살아온 나에서 무엇인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 보리라는 당찬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나도 생활을 해야 하니까 돈도 벌고 내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해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보람된 일을 찾아서 마지막 직장으로 생각하고 열과 성을 다 해 보자 하는 결심이 생겼다. 그러기 위해선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써 먹을 수 있는 곳이 좋을까, 아니면 한국어교원자격증으로 결혼이민자들을 도울까, 아니면 고단한 인생을 감추고 밝게 생활할 수 있는 나의 장점을 이용해서 인생상담을 해 주는 상담사를 해볼까.

졸업반이 되니까 나의 상상력은 커트라인이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웃기는 여자다. 나이도 잊고 날 채용하게 될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못하는 철 없는 아줌마 딱 그것이다. 암튼 난 내가 그동안 해 보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는 그곳에 서류를 냈고 면접까지는 봤다. 자신이 있었는데 나보다 더 훌륭한 면접자가 있었는지 떨어졌다. 어쩔 수 없지 하며 한번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는데 한두 달 쉬면서 봉사부터 시작하자 하고 마음을 먹었었다. 설마 굶기야 하겠냐 하면서. 그런데 봉사하러 가는 첫날 취업이 되었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혼자서 생각했다. 마음을 이쁘게 써서 하늘에서 기회를 다시 주셨나? 감사합니다. 다시 기회를 주셨으니 정말 열심히 한번 해 볼랍니다.

이 모두가 원광디지털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나에게 찾아온 행운이고 , 졸업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학과장님 이하 튜터님들 덕분이고, 배은망덕이라고 생각지 않으시고 꿈을 향해 한걸음 내딛는 저를 그 모습 그대로 봐 주시고 격려 또한 아끼지 않으셨던 함께 했던 모든 분들의 음덕임을 이제사 깨닫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지금 현재 직장을 옮기고 일을 배우느라 나이든 신입으로서 정말 바쁜 2014년 1월을 넘기고 있습니다. 2월의 달력을 넘기고 나면 그때는 일도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이곳의 팀원으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해 낼 수 있으리라 다짐도 해 봅니다.

또한 이 모든 일들이 원광디지털 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어 만들어진 행운이라 생각하고 매사에 감사하며 더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 것을 맹세합니다.

아 그리고 이제부터 월급을 타면 조금씩 또 모아야지요, 그래서 치과 치료를 마칠까 합니다. 아직도 제 보조 치아는 잘 버티고 있답니다.^^
항상 곁에서 지켜봐 주시고 열심히 살라고 격려 아끼지 않으셨던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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