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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인철 교수의 까칠하게 사는 법 작성일 2015-09-23 조회수 2814
오늘 원불교를 창시하신 소태산 대종사님을 까칠함에 비유하여 그 분의 생애를 알아보고, 소태산 대종사님의 삶을 저의 삶에 투영한 것에 대해 강의하려고 합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옥녀봉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득도하실 때까지 옥녀의 보살핌에 의해서 양생이 되셨습니다. 그런 보살핌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종교적인 구도정신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삼밭재에 올라가서 바위 위에서 기도를 하게 됩니다. 독실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별로 성과를 얻지 못합니다. 결국 목숨을 내걸고 이곳저곳으로 전전하면서 기도에 정진하게 됩니다. 그때 거주하셨던 곳이 처음에는 옥녀봉 밑이었는데, 그곳에서 살다가 결혼 후, 구호동으로 이사를 합니다. 또 거기에 거주하다가 가세가 기울고 집안 살림이 형편이 없게 됩니다. 그 이후에 귀영바위쪽으로 오게 되었지만, 그 곳에서도 홍수를 만나게 되어 집 전체가 무너져내리면서 더 이상 머물 수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결국 옮겨 간 곳이 중앙봉 밑의 노루목 즉, 노루의 목 부분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그곳의 빈집에 거주하게 됩니다. 아마도 연화봉과 같은 좋은 곳에 가서 기도해야 득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도 정진을 했지만, 결국은 또 득도를 못하게 됩니다. 그곳도 득도의 터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다시 돌아온 곳이 우리가 얘기하는 노루목의 외딴집입니다. 그때는 이미 건강도 나빠졌고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여기에서 득도를 못하면, 집안도 엉망이 되고 가족들도 모두 먹고살기 어려워서 흩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전체의 민중들이 도탄에 빠진 시기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목숨을 걸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문을 박차고 나옵니다. 드디어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닫고 득도를 합니다. 득도 후 자신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첫 번째 사업을 벌이게 됩니다. 첫 번째 사업은 바로 자신이 살던 동네의 바다를 메우는 간척사업이었습니다. 여러 의견들도 많았겠지만, 지도자로서 이 일을 해냅니다. 결국 주변의 인재들도 얻고 원불교의 기초가 될 수 있게 사람들 간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그 때 제자들과 함께 지냈던 곳이 구간도실 터입니다. 생가 터의 왼쪽으로 옥녀봉과 더욱 가까이 붙어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또 터가 좋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남향이긴 하지만, 위치가 별로라고 여겨서 옮기는데, 정관평을 명당 터로 하는 반대쪽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반대쪽은 지금 현재의 영산성지에 있는 영산원입니다. 북향이지만 충분히 햇빛이 들고 발전 가능성이 있어 옮기게 됩니다. 제가 건축을 전공했지만, 이때의 소태산 대종사님의 건축관과 건축적 디자인 능력을 보면 상당히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열악한 재료를 가지고 이런 작품을 만드셨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후 교세가 확장이 되고 제자들도 자리를 잡자, 원불교의 교훈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때가 1919년으로 삼일운동이 일어난 해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조용한 곳에 들어가 한동안 침잠하시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앞으로 원불교를 어떻게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 것인가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들어가신 곳이 바로 변산구곡입니다. 긴장감을 불어넣고 더 까칠함 쪽으로 더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장바위와 본인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인의 호를 석두거사(石頭居士)라고 하게 됩니다. 석두라는 것이 돌석자, 머리두자입니다. 즉, 본인 스스로 돌머리 도사라고 하면서 거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도 그분이 걸었던 곳을 가보았습니다. 성지를 순례해보면 단순히 책만 보고 알거나 누구한테 전해 들어서 아는 것을 넘어서서 마치 같은 시각에 함께 있는 것처럼 그 분의 생각을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게 풍수가 가진 힘입니다. 제가 변산성지의 골짜기를 올라가서 이런 글씨를 발견했습니다. '봉래구곡'이라고 바위에 써있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자기 자신의 심신을 수양하기 위해 마음에 드는 골짜기에 들어가게 됩니다. 화양구곡은 우암송시열선생의 골짜기입니다. 나름 이름 있는 성리학자라면, 어느 골짜기든 하나를 차지하였던 것입니다. 그 골짜기의 물줄기가 구비 구비 오는데 그것이 아홉 구비나 되는 곳입니다. 이것의 기원은 성리학을 정립한 주희 선생의 무이구곡입니다. 이를 본받아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이 구곡을 경영하게 됩니다. 아마도 소태산 대종사님은 이 당시에 변산에 계시면서 이곳을 왔다 갔다 하며 이 봉래구곡이라는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보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 인장바위가 그 곳에서도 보입니다. 여기 서있는 돌(석립)이 물소리를 듣는다(청수성). 자기 자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 여기 글씨를 보시면, 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표현한 것인데 마치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같다고 소리 나는 그대로 한자로 적으신 겁니다. 그 내용자체가 상당히 범상치 않습니다. '없고 없는 것 또한 없고 없다. 아니고 아닌 것 또한 아니고 아니다.'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저는 이 문구를 상당히 좋아합니다. 이 자리에 가서 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 꼭 흘러가는 물과 제가 대화하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만덕산 초선지는 처음으로 제자들과 선의 경지에 들어가는 자리입니다. 여기도 만덕산의 성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서 기도를 하셨다고 하는데, 제가 가서보니 이 큰 바위와 밑에 큰 바위의 중간이 이렇게 갈라져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바위로 보지 않고 살아있는 동물로 비유하여 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용이 이빨로 아래와 위를 딱 물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여기 앞에서 제자들과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는 '용이 이빨로 깨물어도 깨지지 않는 오히려 용의 이빨이 부러질 정도의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와 관련하여 논문 세편을 썼습니다. 지금의 내용은 논문세편에 쓴 연구결과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다음은 소태산 대종사님과 저를 비교하기보다는 소태산 대종사님의 삶과 저의 삶은 이렇고 앞으로 어떨지에 대해 얘기하려 합니다. 제가 중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중국을 가게 된 제일 큰 목표는 '중국을 이해하자'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다가, 중국의 큰 강인 장강부터 정복해보자고 하여 자전거로 가게 되었습니다. 16박 17일로 하여 2010년 7월 12일부터 28일까지 자전거여행을 하게 됩니다. 자전거 가게에서 자전거를 사서 박스에 넣어 공항에 갔는데 박스가 커서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장강상류, 제가 상류부터 간 이유는 단순한 생각입니다. 물은 위에서부터 밑으로 흐른다. 자전거 바퀴는 둥글다. 높은데서 낮은 데로 자전거는 굴러간다. 그렇게 생각하여 상류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그곳 청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저희 동료와 같이 동행했습니다. 자전거를 조립하여 폼 잡고 출발합니다. 이때는 얼굴이 괜찮지요? 서부의 권총 든 사나이처럼 폼을 잡아봤었습니다. 조금 지나다 보니 점점 여행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밥이 입맛에 맞지 않아 두 끼를 굶으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먹어야 된다.’라고 생각하고 길거리에서 중국 사람들처럼 식사하였습니다. 1,600km의 까칠한 여정을 마무리하고 중국의 칭타오 이공대학에서 이 내용을 가지고 특강을 했습니다. 저는 오늘도 다이아몬드를 찾아서, 다이아몬드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고 행복을 창조하는 WDU Wonderful 대학 조인철교수가 되겠습니다. '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 Wonderful day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강의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원광디지털대학교 동양학과 조인철 교수 감각감상




장소 : 원광디지털대학교 서울캠퍼스
기간 : 2015년 5월 28일(목)
강의자 : 조인철 교수
영상편집자 : 서연지 조교
영상사용음악 : Official National Anthem(Jingle Punks)


행복을 창조하는 wonderful대학 원광디지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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