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특강] 2022학년도 차문화경영학과 익산, 전북지역 신편입생 환영회 특강 - 결혼식 봉차(封茶)의 의미와 조선시대의 여성지위 | 등록일 | 2022-03-31 | 조회수 | 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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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봉차(封茶)의 의미와 조선시대의 여성 지위
송해경 교수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제사 지내는 일(봉제사,奉祭祀)과 손님 접대하는 행위(접빈객, 接賓客)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손님을 모시는 손님상에는 국이 빠질 수 없었으며, 가난하지만 청빈한 선비 류후조가 대원군에게 대접했던 맹물로 끓인 백비탕(白沸湯)에 대해 이전 모임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다. 오늘은 조선시대 관혼상제 중 혼인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차 의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중신아비는 양가를 수시로 방문하였다. 그리고 혼사가 결정되면 신랑집에서는 신부집에 예물을 보내는 납폐(納幣, 함 보내기)가 행해졌다. 이 때 함에는 봉채(封采) 또는 봉차(封茶)라고 하여 차 씨앗 9개를 주머니에 싸서 예단과 함께 보냈다. 신부 집에서는 봉채떡(팥 시루떡 위에 대추 7알을 돌려놓고, 가운데에 흰색 밤을 놓았다)을 준비하고 그 위에 함을 올렸다. 이런 예식의 의미는 떡과 고물처럼 두 부부가 잘 어울려 화목하게 살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팥의 붉은 색은 재앙을 물리치고, 7개의 대추는 다산을 의미하며, 1개의 밤은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의미였다. 그리고 함은 일반적으로 집안에서 가장 복이 많고 아들을 낳은 집안 어른이 개봉하였다. 아마 그 어른처럼 새 부부도 행복하게 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차 씨앗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단 아홉 알을 보낸다는 것은, 아홉은 동양에서 완성의 숫자이고 동시에 다산을 의미한다. 조선은 많은 노동력이 필요로 하는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자식을 많이 생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힘 센 남자아이를 낳는 것은 더욱 중요하였다. 또한 집안의 대를 잇는 것은 남자였기 때문에 시집와서 아들을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七去之惡) 중 하나로 여성들이 소박을 맞아도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다. 차나무 번식에 있어서 요즘은 종자(種子) 파종뿐만 아니라 삽목과 접목 등이 있지만 예전에는 주로 씨앗을 심는 종자 파종이었다. 차나무 씨앗을 심으면 차나무 뿌리는 땅 속 깊이 직근성으로 내려가는 성질이 있다. 그러므로 차나무를 이식할 때 자칫 차뿌리의 생장점을 다치기 쉬워 잘 옮겨심지 않았다. 초의선사 『동다송』 1송에서도 “하늘로부터 명을 받은 차나무는 움직이지 않고 남쪽에서 자란다(受命不遷生南國)”고 하였으며, 이동하지 않는다는 ‘불천(不遷)’은 차나무의 별칭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봉채에 넣은 차 씨앗은 시집온 신부가 죽을 때까지 일부종사(一夫從事)하며 그 집안에 뿌리내리고 잘 살라는 상징적인 의미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여성은 태어나서는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남편이 죽고 나면 아들에게 의지하는 삼종지도(三從之道)와 남존여비(男尊女卑)를 미덕으로 삼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조선 전기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재산상속과 제사 등에서 남녀의 차이가 없었으며, 재혼도 가능했다. 재산은 비교적 균일하게 상속되었으며, 제사는 아들 딸을 구별하지 않고 돌아가며 지내는 윤행봉사(輪行奉祀)를 하였다. 재가한 여성의 자녀도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았으며, 결혼 후에도 시댁에 가지 않고 오랫동안 친정살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신사임당은 친정인 강릉 오죽헌에서 남편의 동의를 받고, 20년 남짓 살다가 서울 시댁으로 올라갔다. 당시 결혼 풍속은 ‘여성’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행해졌고, 여자가 ‘시집 간다’라는 표현보다는 남자가 ‘장가 간다’ ‘장가든다’라는 표현이 더 보편적이었다. * 그렇다면 조선 후기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낮아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무참히 무너졌고, 이런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예치(禮治)였다. 조광조-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로 이어지는 예학은 주자의 학설을 계승하고 신봉하였다. 김장생은 『주자가례』를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수정 보완하여 1599년 『가례집람』을 만들었다. 송시열에 의해 재정비된 조선 성리학은 그 후 조선 학계의 정통으로 자리 매김되었고, 그의 사상은 조선 후기 강력한 지배 이념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면서 삼종지도(三從之道), 남존여비(男尊女卑)와 같은 사상이 출현하여 여성은 남성의 종속물처럼 변했다. 즉 남성의 무능력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유교질서가 강화되었고,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낮아지게 된 것이다. 또한 어려서부터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여 남녀를 구분하였고, 여성의 교육 기회를 박탈하였으며 여성의 존재를 규방 안으로 한정해 버렸다. 어떻든 결혼은 남녀 이성의 결합이라기 보다 양가 가문의 결합으로 간주되었으며, 남편이 첩을 두어도 정당화되었고 남편과 사별한 젊은 여성의 재가도 금지되었다. 또한 여성은 시집에서 장님 3년,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을 해야 하는 무서운 시집살이를 하게 되었다. 16세기 유럽 중세 봉건사회에서도 노동력이 우선시 되면서 여성은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는 지위로 낮아졌다. 옷을 만드는 일도 여성이 하면 ‘집안 일’이었고, 남성이 하면 ‘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 여성의 지위가 상승하기 시작한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이후였다. 1893년 뉴질랜드, 호주(1902), 핀란드(1906), 노르웨이, 덴마크, 러시아, 미국(1920), 영국(1928)이 선거에서 21세 이상 여성들에게 선거권(참정권)이 주어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1948년 첫 선거에서부터 여성들에게 선거권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여성들의 학력이 높아지면서 ‘남녀 평등’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 상위시대’라는 용어도 심심치 않게 듣게 되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본론으로 돌아 와 결혼식이나 손님을 접대할 때 차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 차례나 제사에서도 차를 올리게 된 것은 차가 귀했던 시절 귀한 제물을 조상에게 받히는 의식다례의 성격이 강하게 작용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점차 차의 증식이 용이해지고, 차산업이 발전하면서 차는 사람을 귀하게 대접하는 음료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음료로서 차를 즐기게 되었다. 비로소 대중적으로 차를 즐겨 마시는 차인들이 증가하게 되었으며, 차는 의식용 다례가 아니라 일상에서 즐기는 생활차가 된 것이다. 또한 최근에는 차례나 제사를 지낼 때 술과 함께 차를 올리는 가정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이것은 차문화가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는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또한 그래야만 살아있는 문화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 변화에 따라 우리 차인들에게는 막중한 새로운 의무(활동 영역)가 생겨났다. 동호인인 차인들 끼리 모여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로 태동하기 시작하는 ‘생활차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일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차를 마시게 하고, 일상생활에서 항상 차가 옆에 있게 하는 문화를 확산 시켜야 하는 일이다. 특히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에게 차를 마실 기회를 제공하는 일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 차문화의 발전과 정착을 위해서도 우리 차인들이 반드시 노력을 기울여야 할 분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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